한국과 글로벌 기술 기업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표한 9,500억 달러 규모의 협력은 일회성 지출이라기보다 구조적 전환으로 읽힌다. 한국 반도체 기업을 세계 인공지능 경제의 중심에 단단히 묶어 두는 변화다.

이번 합의에는 한국 측에서 삼성전자, SK그룹, 현대자동차그룹, 네이버가, 상대편에는 엔비디아, 오픈AI, 브로드컴, 앤트로픽이 참여했다. 이들 합의는 일주일간의 정상외교를 되돌리기 어려운 장기 약속으로 바꿔 놓았으며, 그 위에 쌓이는 거의 모든 층위의 바탕에 한국산 하드웨어를 자리매김했다.

반도체 계약, 자세히 들여다보기

가장 큰 약속은 메모리를 관통한다. SK그룹은 5년에 걸쳐 약 7,500억 달러 규모의 장기 계약을 맺었으며, 여기에는 SK하이닉스와 엔비디아의 5,000억 달러가 넘는 협력이 포함된다. AI 가속기가 없어서는 안 되는 고대역폭 메모리, 즉 HBM 칩이 핵심이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2,000억 달러 규모의 브로드컴과의 전략적 협력을 추가했다. 메모리와 파운드리 제조, 첨단 패키징을 아우르는 내용이다. 네이버는 이른바 AI 팩토리에 약 100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엔비디아, 캐나다 자산운용사 브룩필드와 함께 전 세계에 기가와트급 컴퓨팅 시설을 세운다는 계획이다.

실제 장비가 놓이는 곳

일부 합의는 하드웨어를 구체적으로 지목할 만큼 구체적이다. SK텔레콤은 엔비디아의 베라 루빈 프로세서와 SK하이닉스의 HBM4 메모리를 결합한 2기가와트 규모의 데이터센터를 짓기로 했다. 한국의 부품과 미국의 연산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보여주는 설계도와 같은 조합이다.

이러한 구체성은 중요하다. 기본 합의는 흔히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지만, 칩과 용량을 명시하는 순간 양해각서는 공학적 계획에 가까워진다. 구매자들이 발표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구축하려 한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의지의 선언

이재명 대통령은 이 자리를 빌려 샌프란시스코 AI 선언을 발표하며 한국을 세계 AI 공급의 대체 불가능한 기둥으로 규정했다. 그는 메모리 반도체에서의 세계적 경쟁력을 바탕으로 한국이 신뢰할 수 있는 제조 기반이자 이 기술의 세계적 시험대이자 생산 플랫폼이 되겠다고 말했다.

표현은 의도적이었다. 이 대통령은 한국을 AI의 구매자나 경쟁 연구소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공급자로, 나머지 산업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AI의 혜택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가 함께 나누는 것으로 제시했다.

공급망이 서울을 지나는 이유

그 밑바탕의 논리는 단순하다. 세계의 이목을 빨아들이는 모델과 데이터센터는 소수의 핵심 부품에 의존하며, 한국 기업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층위를 만든다. 첨단 프로세서에 데이터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고대역폭 메모리다. 수년치 공급을 확정하는 것은 글로벌 구매자에게는 확실성을, 한국에는 지렛대를 준다.

이번 선언은 더 넓은 야망도 내비쳤다. 협력의 틀을 활용해 AI를 앞서가는 나라와 뒤처진 나라 사이의 격차를 좁히겠다는 것이다. 9,500억 달러가 실제 구축된 설비로 매끄럽게 이어질지는 여러 해가 지나야 판단할 수 있겠지만, 방향만큼은 분명하다. AI 미래로 가는 길이 상당 부분 한국산 반도체로 포장되고 있다는 것이다.